지은이 :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제목 : 작은 것들의 신(The God of Small Things)
번역 : 박찬원
출판사 : 문학동네
출간 연도 : 2016. 1
원문 출간 연도 : 1997년
페이지 : 총 448쪽
역사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의 의의가 다르게 해석되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는 승리자를 중심으로 쓰인다. 승리자는 그 사회의 지배계층이 되고 자연스럽게 피지배계층이 생겨난다. 불평등의 역사가 지속되면 불평등은 점점 그 나라의 전통과 관습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1961년 인도에서 태어난 아룬다티 로이는 이 불평등의 역사 앞에 맞서서 주체적으로 살아온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이다. 약 90년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1947년 독립이 되어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작가가 살아가는 인도 사회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뒤편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카스트제도와 종교 대립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불평등한 사회이다. 다른 계급의 카스트와 결혼을 못하게 하는 것이 불법으로 규정되고 관습법에 따라 처벌하거나 명예살인 등을 행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인도의 현실 속에서 작가는 인도 정부가 반대하는 카슈미르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인도 정부의 핵 개발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정책을 비판하며, 미국식 자본주의와 공공의 민영화 문제를 지적한다. 언제나 역사 앞에서 상처받고 생존을 위협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 온 작가는 「작은 것들의 신」에서 역사 앞에서 무너지는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인도 남부 케랄라 주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란성쌍둥이 라헬과 에스타이다. 이들의 엄마인 암무는 '다른 공동체 사람'과 '연애결혼'했다 '이혼'한 여성으로 가족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며 살아간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과 이혼한 암무는 다시 친정집으로 돌아와 살게 되는데, 그녀의 집안은 망명 있는 상류층 집안이라 물질적으로는 어려운 것 없이 지낸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능력이 없음에도 모든 재산을 소유하고 누리는 오빠 차코와 자신의 감정과 안위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고모 베이비 코참마와 함께 살면서 나 자신을 누르며 살아간다.
이제 7살인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는 아직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장난기 많은 순수한 아이들이다. 그들에게는 최고의 친구인 불가촉천민 벨루타가 있다. 아이들의 장난에 발맞춰주고 손수 장난감을 만들어주는 다정한 청년이다. 똑똑하고 손재주가 좋아 차코의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지만,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로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안타까운 청년이다.
차코에게는 영국 유학시절 만나 결혼했지만 지금은 이혼한 영국인 아내 마거릿과 갓난아기 때 한번 봤을 뿐인 딸 소피가 있다. 마거릿의 새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게 되면서 차코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인도에서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며 집으로 초대하게 된다. 마거릿과 소피의 등장과 맞물려서 역사가 허용하지 않는 사랑이 시작되고, 모든 사건들이 맞물리면서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소설은 성인이 된 라헬이 '하루 만에 모든 것을 바꾸어놓은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도입 부분에서 라헬과 에스타의 영국인 조카 소피의 장례식이 나오고, 서른한 살의 나이에 죽은 암무와 공허함 속에서 살아가는 라헬, 실어증에 걸린 에스타의 현재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며 이야기는 비극을 향해 가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아홉살의 소피가 왜 죽었을까, 소피의 죽음으로 인해 암무와 라헬, 에스타는 왜 헤어져야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어쩌면 암무, 에스타, 그리고 그녀가 그런 분류 기준을 벗어나는 최악의 경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 그들 모두 규칙을 어겼다. 모두 금지된 땅에 발을 들였다. 모두 법을 어겼다.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정해놓은 법칙을. p.50
또래 다른 아이들이 다른 것들을 배울 때, 에스타와 라헬은 역사가 어떻게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기는 이들에게서 벌금을 거둬들이는지 배웠다. 그것의 소름 끼치는 울림을 들었다. 그것의 냄새를 맡았고, 결코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역사의 냄새.
바람결에 실려오는 오래된 장미향 같은. p.82
사회의 관습과 규칙, 기준들이 오랜 시간 쌓여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라헬, 에스타 그리고 암무가 그랬다. 그들이 좋아하고 사랑했던 벨루타도 그랬다. 사회적 상황을 모두 배제하고 그들을 바라보면 그저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이 보이지만, 사회가 만들어놓은 법칙들 속에서 그들은 죄인이 되어 버린다. 그들 스스로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이어서 그랬던 걸까. 금방 피었다 지는 목련꽃처럼 사랑을 피웠지만, 이내 무참히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 그들은 애초부터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작은 존재들'이었기에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저 무너져 내린다. 그들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기에 거짓된 이야기로 날조되어 역사에 남겨지고 진실은 영영 사라진다.
때때로 라디오에서 좋아했던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마음속에서 뭔가가 그녀를 휘저었다. 수액 같은 아픔이 피부 아래로 퍼져나갔고, 마녀처럼 세상을 벗어나 더 나은, 더 행복한 곳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날이면 그녀에게서 어딘가 들뜬 야성적인 기미가 보였다. 어머니로서, 이혼녀로서 지켜야 할 도덕성에서 잠시 비켜선 듯한 모습이었다.
...
무엇이 암무를 이렇게 '위태로운 칼날' 위에 서게 했는가? 예측 불가능한 이런 분위기를 풍기게 했는가? 그것은 내면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하나로 섞일 수 없는 기질. 어머니의 무한한 애정과 자살폭탄범의 무모한 분노. 그것이 마음속에서 커졌고, 결국에는 낮에 그녀의 아이들이 사랑했던 그 남자를 밤에 그녀가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낮에 탔던 배를 밤에 타도록 했다. p.68
억눌려있는 개인의 자유와 가치관이 분출되는 것을 잘 표현된 구절이라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그 음악이 필요한 순간에 우연히 들었을 때 느껴지던 그 감정과 두근거림이 떠올랐다. 조용히 스며드는 만족감과 행복. 암무는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잠시 자신을 억압하던 사회적 상황과 규칙들을 잊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된다. 내가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행동들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음악에는 닫혀있던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힘이 있다.
암무의 자유로운 행동이 비록 사회가 용인하지 않았기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지만, 그녀가 보여준 이혼녀라고 낙인찍히지 않는 당당함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바라보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인지 그녀의 자유로운 행동이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에스타펜과 라헬이 그날 아침 목격한 것은, 비록 그때는 몰랐지만, 지배권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보여주는, 통제된 조건(어쩄든 전쟁도, 집단 학살도 아니었다)에서 진행된 임상 실험이었다. 구조, 질서, 완전한 독점을 추구하는 본성. '신의 의도'로 가장한 채 어린 관중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역사였다.
그날 아침 일어난 일에 우연은 없었다. 우발적인 것도 없었다. 노상강도도 개인적인 보복도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실연 중인 역사.
그들이 의도했던 것보다 벨루타를 더 때렸다면, 그것인 연대감, 그들과 벨루타 사이의 어떠한 연결고리, 그러니까 적어도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인간이라는 의미마저 오래전에 잘려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 남자를 체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악령을 쫓듯 두려움을 내쫓고 있었다. p.422
'역사'의 작은 것들을 향한 잔인함과 공격성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작가가 권력에 맞서서 역사가 짓밟으려 하는 것들을 위해 싸우는 삶을 살아서 그런지, 권력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본인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본인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어기는 존재들에게 어떻게 돌변하는지 책 전체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공정하게 법을 지키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경찰들과 카스트제도를 반대하고 만인의 평등을 위해 구호를 외치는 공산주의 지도자까지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경찰과 공산주의는 껍데기로 이용만 할 뿐인 인도의 슬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주변에도 역사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많은 '작은 존재들'이 있다. 멀리는 조선시대 천민, 노비 등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있고, 가까이는 매일 생명이 꺼져가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산업재해 노동자들이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예전보다는 '작은 존재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고 법적으로도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현실인 것 같다. 한국에 사는 또 다른 라헬과 에스타가 무력감을 느끼고 좌절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프다.
인도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계급과 차별의 문제는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책을 이해하고 감동을 받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라헬과 에스타의 장난기 넘치는 언어유희들과 가끔 나오는 인도 남부의 언어인 말라얄람어가 낯설지만 친절하게 해설이 잘 달려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흩어진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지듯 '운명의 날'을 향해 맞춰지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야기들이 지루함 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조금씩 감질나게 결말의 조각들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묘미이다. 역사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사라져 버린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고 싶다면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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